피카소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 Período Azul, 1901-1904) 특별전을 다녀왔다. 2021년 마지막 날 급 결정한, 2022년 새해의 첫 데이트 일정. 슬프게도 우리 방문 후 딱 사흘 만에 온타리오가 락다운에 다시 돌입하면서 AGO는 또 문을 닫고 말았다.

 

일요일 오전에 비교적 사람 없을 때 가자.. 해서 미술관이 개장하는 오전 10시 반에 맞춰 갔다. 지난 밤부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10시 20분 즈음 도착했는데, 미술관 앞에는 이미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미술관 바로 건너편 카페로 들어가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한 잔 씩 시켰다.

 

 

10분 안에 커피 사가지고 차 안에서 홀짝 마시고, 사람들이 미술관 안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우리도 줄을 서기 위해 나갔다.

 

우리는 이 특별전을 보기 전에 미리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더 지니어스 (The Genius) 피카소 전기 시리즈의 청색 시대 에피소드로 공부(?)를 좀 하고 갔음 ㅋㅋㅋㅋ

 

이 시리즈가 어디서부터 픽션인지, 양념인지 모호했지만 일단 실화를 바탕으로 기획된 성공시대 너낌 팩션 드라마이기 때문에, 이 쇼를 보고 간 것은 피카소 청색시대 특별전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투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마스크 오브 조로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피카소로 출연한다. 나 어렸을 때 조로 짱팬이었는데 (나이 커밍아웃 ㅋㅋㅋㅋ) 그 당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캐서린 제타 존스라고 생각했음 ㅋㅋㅋ

 

이 시리즈에 대해 한 마디 감상을 말하자면, 다큐와 드라마 그 중간 어딘가의 시리즈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되고, 그냥 시대적 이해를 위해 가볍게 보고 가면 신선한 예습이 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개연성 없는 스토리 라인과 모든 등장인물의 뜨악스러운 연기력에 (심지어 조로 아저씨마저) 충격을 금치 못했으나, 나중에 알아보니 피카소의 인생 자체가 매우 평범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연성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ㅋㅋㅋ (허나 연기력은 아직도 인정 모ㅌㅐ....)

 

아래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피카소편 공식 티져이다.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하시는 분들 중 피카소 특별전을 방문하실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추천한다:

 

 

피카소의 청색시대는 1901년부터 1904년으로. 이 때 그려진 작품들은 1881년생인 피카소의 가장 혈기왕성하면서도 혼란한 20세 부터 23세까지의 작품들이다.

 

이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로 막 상경한 스페인 출신 외국인이자, 젊고 무명인 가난한 화가였다. 절친인 카를로스 카사예마스가 실연하고 권총으로 자살하자 우울에 빠진 피카소가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그 때부터 푸른색과 청록색, 그리고 잿빛 물감으로 소외 계층만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을 통해 나는 단순히 피카소의 청색시대가 그의 20대 초반 시절 우울만을 반영한다기 보다, 피카소의 깊은 내면에 잠재했던 따뜻하고 숭고한 인간성이 아주 강하게 발현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피카소 청색시대는, 앞서 말했듯이 피카소가 가난한 무명 외국인 작가였던 시절이다. 피카소는 이 시기 성병에 걸린 매춘부들, 길거리 거지, 죄수들, 미친 사람들, 환자들을 아주 열심히 그렸는데, 이런 우울하고 다소 불편할 수 있는 그림이 팔릴리 만무했다. 더욱이 무명이었던 피카소의 그림이라면 말이다. 그걸 배고프고 가난했던 피카소가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들을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리고 또 그렸다. 스스로 병원과 감옥을 들락거리면서까지 말이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매춘부라고 한다.
여동생인 롤라
피카소의 자화상과 그 옆 매춘부들 (추정)
The Blue Room (1901)

피카소 청색시대의 가장 초기 작품들 중 하나. 에드가 드가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자가 작은 방 안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재밌는 점은, 이 그림이 덧칠된 그림이라는 점이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밑에 화풍이 다른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또 한 가지 내가 재밌다고 생각했던 점은, 이 시대 피카소 그림에는 언제나 까만 아웃라인이 있다는 점이다. 피카소만의 특징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미술학원 다닐 적 아웃라인 그렸다고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들었던 초딩의 입장에서는 신선한 발견이었다 ㅋㅋ

 

 

청색시대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Crouching Beggar, 1902년 작. 설명을 읽어보면 여성의 흰 베일이 후광?의 효과가 있고,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그런 설명이 주를 이룬다. 피카소는 특히나 청색시대에 유난히 여성들을 많이 그렸는데, 설명에 보면 이 모든 작품에 마리아에 대한 메타포를 강조해서 실제로 피카소도 그 생각을 하고 그렸을까 싶다. 피카소는 사실 무교였다고 한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스페인,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면 카톨릭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긴 했을 것이다.

 

 

이건 자주 가던 병원에서 이미 죽은 여성을 보고 집에 와서 시체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특이했던 점은, 거짓말처럼 이 작품에서 입술만 빨갛게 선을 그려놓았다.

 

 

그리고 피카소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The Soup(스프, 1903년 작). 이 작품은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스프를 가져다 주는 성스러운 장면을 묘사함으로, 모성애와 일상의 경건함을 그려내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피카소는 유독 어머니의 가사와 희생, 모성애, 그리고 노동의 경건함을 아주 많이 담아내었다. 실제로 피카소는 어머니와 사이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피카소"라는 성도 사실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피카소는 첫사랑으로 알려진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청색시대를 마무리 짓고 장밋빛시대(Rose Period, 1905-1906)화풍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특별전은 청색시대 작품들 뿐 아니라, 장밋빛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보통 페르낭드를 모델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프랑스인인 페르낭드를 스페인으로 데려가 그곳의 황금 햇살과 황토빛 마을을 무대로 사랑을 키운 것 같은데, 분위기와 색채가 180도 확연히 달라져 청색시대 작품들과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 지니어스에 나오는 페르낭드는 진짜 ㅋㅋㅋㅋㅋ 고구마 답답 무개연성 지팔지꼰 캐릭터인데 실제 성격은 어땠는지 몰라도 피카소의 수 많은 애인들 중 가장 가난하고 배고팠을 때 함께 했던 여자였다는 점이 동정심을 유발한다. 조강지처 포지션인 것 같은데 고생은 혼자 다 하고 피카소 잘 나가서 맨날 파티하고 캐비어 먹을 땐 다른 여자들이랑 있었다고 생각하면.. ㅋㅋ 나중에 피카소가 유명하고 부자가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싶다. 죽을 때까지 피카소에게 돈을 받아 생활하다 병사했다는 이야기가 있긴 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디즈니 플러스 더 지니어스 피카소편 3-4편 한번 보시길 ㅋㅋ 이 두 편에만 피카소 여자들이 서너 명 나오는데, 페르낭드는 그 중 가장 짠내나는 (그리고 이해 안가는 ㅠㅠ) 캐릭터이다.

 

 

피카소 특별전을 빠져 나오니 바로 이어져 있던 캐나다 화가 매튜 웡(Matthew Wong)의 블루 뷰 전시회. 1985년에 태어났지만 2019년 요절했다. 독학으로 미술을 배운, 홍콩계 캐네디언이었는데, 자폐 스펙트럼이 있었다 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개인적으로 매튜 웡 전시회도 너무 좋았다. 남자친구는 피카소 청색시대 작품들보다 매튜 웡 작품들이 더 좋았다 한다 (피카소는 너무 우울했다고..)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작품. 별 네 개가 반짝인다.

 

 

윗층에 Red Is Beautiful 전시회가 있어 그곳도 다녀왔다. 캐나다 원주민 작가인 매니토바 출신의 Robert Houle 특별전으로, 백인 중심의 현대 세계관을 신랄하게 꼬집는 작품들부터 원주민 정체성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

 

"영국과 프랑스, 지들끼리 우리 땅에서 북치고 장구치는 중"
출처: The Star

 

이 중 우연히 로댕의 작품도 만났다.

 

어차피 AGO annual pass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더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특별전을 또 방문하고 싶었는데, 1월 5일부터 다시 문을 닫는다니 많이 아쉽다.

 

남자친구가 기념으로 사줬다. 부엌에 걸어놓으라고 ㅋㅋㅋ

 

2020년에는 루벤스 특별전으로 새해를 열었었는데, 2022년은 피카소, 그리고 웡의 작품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찾아보니 피카소 청색시대 특별전은 토론토를 찍고, 워싱턴 D.C.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고 한다. 원래 2월 예정이었던 워싱턴에서의 특별전이 코로나 때문에 미뤄질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들이 워싱턴으로 이동하기 전에 AGO에 한번 더 가서 보고싶은 마음이 있다.

 

얼른 이 힘든 시간들이 모두 지나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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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서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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