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는 좋아하지 않았다. 극 중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전무했다. 이지안도, 박동훈도 그래 너희들 참 기구하구나 싶은데.. 나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우울하게 다가왔고, 심지어 음침하기까지 했다. 많은 지인들이 극찬의 극찬을 해서 첫 화 조금 보다 하차하고, 희망을 갖고 조금씩 더 봐보고, 그렇게  꾸역꾸역 보다 마지막까지도 그냥 아.. 뭐 그래.. 무슨 느낌인진 알겠네. 하고 끝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엄마가 먼저 보셨다. 넷플릭스에서 매주 업데이트 되는 걸 손꼽아 기다리시며 처음부터 그렇게, 실시간으로 보셨다고 한다. 전글에도 썼지만, 엄마가 구씨 매력있다 그래서 "그래 손석구!! 난 손석구 최고의 이혼 때부터 좋아했는데 너무 빵 떴다 이번에!" 뭐,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었다. 나 곧 볼거라고, 스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나의 해방일지>가 종영하자마자 바로 정주행에 들어갔다. 5월 30일 1화 시작, 6월 1일에 다 끝냄. 직장인이 이거 보고 싶어서 2일 째엔 새벽 6시에 일어나고 그랬다 -_-

 

 

<나의 해방일지>는 너무나도 <나의 아저씨>와 같은,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작처럼 내게 극도로 우울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적당히, 공감할 수 있을만큼만 우울하고, 또 그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희망적이고, 또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환희가 가득 찬 드라마였다.

 

엄마가 그랬다. 이 작가는 타고난 성향이 우울한 사람일거라고. 하루하루를, 정말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나의 아저씨> 때도 그랬지만, 이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현실적이면서 뼛속부터 비극적인, "세상에 태어나버린" 인간군상을 잘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사흘 내내, 박해영 작가의 시시콜콜한 이력과 역사가 너무나 궁금했다. 이 사람은 분명히 평범한 직장생활도 했을 것이고, 교회 혹은 성당을 다녔을 것이며, 엄마 말씀처럼 타고나길 조금은 우울감있는 사람일 수 있겠다 (만약 이 중 단 하나도 아니라면, 정말 천재적인 작가라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나의 아저씨> 때는 거동도 못하는 할머니를 보살피며, 사채업자에게 맞아가며 가시 돋힌 매일매일을 힘겹게 싸워나가는 소녀가장 이지안의 인생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박동훈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결국 <나의 아저씨>가 더 낫냐, <나의 해방일지> 더 낫냐의 문제는 시청자가 얼마만큼 작중 캐릭터들에 공감할 수 있느냐로 갈리는 것 같다. 나에게는 압도적으로 <나의 해방일지>가 더 슬펐고, 현실적이었으며 감동적이었고 또 동시에, 시청하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다.

 

이 드라마는 작가가 의도를 했던 안했던, 지극히 종교적이며 사랑의 본질을 저기 저 멀리 밑바닥까지 꿰뜷고 있는 드라마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작중 캐릭터 개개인의 복합적인 면모를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작중 주연 배우들 뿐만 아니라, 조연들에게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 서사를 부여시켜줬는지까지. 정말 지극히 천재적이며, 한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작가라 극찬하지 않을 수 없다.

 

미정이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신께 성적 등을 비는 아이들을 두고 미정이는 의문했다고. 고작 신에게 그런걸 빈다고? 나라면, "나는 뭐예요?" 라고 물을거라고.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걸 보고 이런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에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어마어마하다, 이 작가...

 

마지막화에, 태훈이 기정에게 임신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한 것을 두고 사과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 아장아장 걷는 애들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30년 후에 어떤 짐을 살아갈까, 어떤 모욕을 견디며 살아갈까.

나니까 견뎠지, 저 아이는, 그 어떤 애도 그런 일은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도 저런 생각을 매일 하고 산 적이 있기에.. 사실 지금도 이런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긴 하다. (희한하게 나는 미정-자경 커플 볼 때는 그냥 마냥 흐뭇했고, 기정-태훈 커플씬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다.. 목떨어진 장미씬을 비롯해서.)

 

인생을 살아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쯤,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듯한 시기를 지나가는 것 같다. 그 시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게 우리네 인생이 비극인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우리는 그 시기를 어찌어찌 극복하고 하루하루 또 힘내서 살아간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우울한 시기를 매일매일, 끝없는 터너를 지나는 것처럼 지나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두고 만성 우울증 환자라고 진단내릴 수 있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런 면에서, 미정이는 거의 날때부터 만성 우울증 환자였다.

 

그런 미정이의 독백들 중, 내 마음 속 깊이 와닿지 않는 대사들이 단 한 줄도 없었다. 감탄스러웠다.

 

언젠가 이런 시기를 지나온 나조차도, 누군가 지금 당장 그 때의 감정을 미정이의 독백처럼 풀어보라고 펜을 쥐어주면 단 한 글자도 못쓸 것 같다. 당시에는 정말 폭발적으로 증오하고, 또 의문했음에도 말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우울의 시기를 생 날 것으로, 게다가 미정이 한 사람만이 아닌 극 중 모든 인물들에 부여하고, 이들의 서사에 맞게 잘 풀어내갔을까? 작가가 실제로 현재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다면,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능력이다. 정말 프로는 프로고, 천재 맞다.

 

내가 이렇게 감탄해마지 않는 작가는, 실제로 미정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우울의 시기를 잘 버텨내고, 결국엔 "사랑"으로 구원받고 깨달음을 얻은 경험이 있었던게 아닐까? 아주 감히 짐작해본다. 만일 작가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추앙"이라는 이 드라마의 테마가 내게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다 풀어나가지를 못하겠다. 내가 능력이 없는 탓이겠다 -_-

 

못다한 가벼운 이야기를 몇 개 풀어나가자면..

 

엄마에게도 말했지만, 특히나 <나의 해방일지>는, 여성들의 구원 판타지를 채워주는 면모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ㅋㅋ 갱생 안되는 나쁜남자 인간으로 만들어 보자고 사겨봤던 여성분들.. 한번 손 들어봐유 ㅋㅋ (✋ 흑역사... 허허)

 

호빠 출신 조폭을 미화했다 그런 논란도 있는 것 같던데, 작가는 애초에 업으로 사람을 평하지 않는 분인 것 같다.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이 단 1% 라도 있다면, 그 인간을 감히 인간의 눈으로 정죄 않고, 오로지 영혼을 마주보고 대화하려는 분.

 

진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구씨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거라고 짐작은 했건만 호빠 출신 조폭이라니.. 조금 너무 뻔했던건 아닌가.. 하면서도,

 

그런 설정이 없었다면 맹탕맹탕 술만 마시고 세월아 네월아 하는 구씨의 마초적 매력(이라 쓰고 구원하고픈 남자라 읽는다 ㅋㅋ)이 16화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극대화 되기 힘들었을 수 있겠다 싶다.

 

마지막으로, 삼남매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너무 뜬금이다.. 하시는데, 나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봤다.

 

비록 옛날 이야기지만, 건너건너 아는 아주머니들이 (내 기준 할머니 연배) 시아버지 생신상 차리다, 겨울에 김장 하다 과로사 하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분은 미정이네 어머니처럼 주무시다 못일어나셨고, 어느 분은 김장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즉사하셨다 하고.

 

삼남매 아버지 염제호의 재혼도 너무나 뜬금없고 의리없다 생각했지만, 마지막 화를 보고는 그냥 눈물만 나왔다.

 

재혼한 아주머니가 기정이와 담요를 덮고 내리는 눈을 보며 감격해 마지않는 장면. 어떻게 작가는 이 분에게까지 "해방"의 서사를 부여할 생각을 다했을까?...

 

미정, 구씨, 기정, 창희, 태훈. 그리고 이 드라마를 빛내준 보석같은 조연분들.. (특히 창희 친구 두환 역할의 한상조님.. 애정합니다. 아쒸 그런데 나보다 동생이야 ㅡ.,ㅡ)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며, 각기 다른 모양, 색깔의 해방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해방은, "추앙"을 통해서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결심이다" 라고 정의했다.

 

추앙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조건없이 응원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진짜 가장 중요한게 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어준다. 비록 인간은 나약하고 간사해서, 곧 또 까먹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인생을 살아내가면서 주기적으로 봐줘야 된다. 그런 작품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인생의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두고두고 아껴가며, 계속해서 꺼내봐야 하는, 그런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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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캐서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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